2009년 5월, 기억하기 위해서

1. 영화 <쇼생크 탈출>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에디가 남 몰래 탈옥을 결심한 무렵이다. 에디의 심상치 않은 언행에 동료 죄수들은 자살하려는 게 아닐까 불안해한다. 두 달 동안 독방에 갇혀지낸 데다 아끼던 제자는 에디의 결백을 밝히려다 죽었기 때문이다.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불안한 눈길을 나누던 동료 죄수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아냐, 에디가 그럴 리 없어, 에디는 절대 안 그래"라 말하며, 에디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레드를 동의를 구하는 눈길로 쳐다본다. 레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혼자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는 법이다."
영화의 결말은 달랐지만, 얼마 전의 현실은 이 장면, 이 대사를 수도 없이 되풀이 되풀이 되풀이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는 법이다."
5월 23일 오전 열시 무렵, 나는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전화를 걸려고 휴대전화기를 꺼내다, 들어와 있는 문자메세지를 읽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잠시 허둥대다 전화를 걸었고, 짧은 통화를 끝낸 뒤에는 더욱 허둥거리다가 마침 도착한 버스를 탔다. 버스 안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 방송을 듣고 있다가 어느 무렵에선가 그런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좀 더 버텨줄 것이지, 좀 더 버티며 싸워줄 것이지. 설핏 그런 생각을 해보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영화에 나왔던 저 말이 생각났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는 법이다."
불만스러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 있다. 인간인 한은 누구에게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는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이다. 부끄러워하랄 일도 나약하다 할 일도 아니다. 사나운 바람에 시달리던 나뭇잎이 결국은 나뭇가지를 더 붙잡고 버티지 못했다 해서 흠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2.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믿어주지 않아 미안하다, 힘든 싸움 떠맡겨놓고 외면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미안하지 않다. 그는 그의 신념에 따라 살았고 그의 방법대로 세상과 싸웠다. 나 또한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내 방법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움켜쥘 수 있는 권력을 합리적 체계에 따라 분산시키고자 고심할 때, 나는 그를 지지했다. 필요한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로 한미 FTA 체결을 추진할 때, 나는 그를 비판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 내심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일 거라고 나는 인정했다.
어쩌랴, 그는 한 나라의 최고 책임자였고 나는 삼천만 정도의 유권자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자기 신념에 따라 때로 승부수를 던지고 때로 뚝심 있게 밀어부쳐야 하는 게 그의 사명이었다면, 그의 행적을 지켜보고 판단하는 것이 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보다는 진지하게 숙고하고 정직하게 의견을 밝히는 것이, 정치인이자 국가지도자였던 그와 일개 유권자인 나 사이에서 맺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관계였다고 지금도 믿는다.

3. 오월 중순쯤에 같이 일하는 사람과 점심을 먹다가, 사회 상황이 잠깐 화제에 올랐다. 동료가, 70, 80년대 상황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버린 것 아니냐는 말을 하길래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많은 측면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아직은, 내놓고든 암암리에든, 사람을 함부로 죽여대지는 못하잖아요, 장준하, 박종철, 또 강집되어 갔다가 시체로 돌아온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런 면에서는 아직도 최후의 선은 남아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나눈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버렸다. 그래서 돌이켜 생각해봤다. 이 정권이 집권한 지 불과 1년 새 죽은 사람의 수가 이미 적지가 않다. 용산과 노무현, 그리고 조금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박종태...... 방법과 기술이 달라졌을 뿐, 사람을 고문하고 죽여댄다는 점에서도 이 정권은 이미 70, 80년대의 수준으로 퇴행해 있는 것이 아닐까. 공정한 삶의 규칙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두고 싸워야 하는 시대가 어느결에 다시 돌아오고야 만 것이 아닐까.

4. 박연차 리스트가 한창 언론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던 당시에 나는 뉴스를 전혀 보지 않고 있었다. 벌여놓은 일이 있어 꼬박꼬박 시간 내어 신문을 찾아 읽을 정신이 없었기도 하거니와, 지난 1년 동안의 '뉴스'라는 것에 충분히 단련되어 어떤 새소식도 새로울 것 없다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끼리 주고받는 말을 통해 박연차 리스트라는 것이 정치인에게 흘러들어간 부정한 뒷돈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좀 더 지나서는 노무현 정부와 연관된 수사라는 것 정도를 그나마 어렴풋이 알게 된 정도였다.
그 무렵에 어떤 사람들은, 10억 정도의 돈이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이냐는 요지의 말을, 노무현의 역성을 든답시고 하기도 했는데, 나는 이런 논리가 몹시도 못마땅했다. 10억 받은 혐의로 이 정도로 철저하게 조사한다면 100억 받은 혐의가 있는 사람은 더욱 철저하게 수사하라는 말과, 100억 받은 놈도 대충 넘어갔으니 10억 받은 사람은 더더욱 대충 넘겨야 한다는 말은 완전히 다른 말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어수선하던 무렵에 노무현이 홈페이지에, "저는 더 이상 여러분이 지향하는 도덕성, 개혁성의 상징이 될 자격을 잃었습니다. 저를 버리고 가십시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나는, 어떻게 책임지고 어떻게 매듭지어야 하는지 손수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새로운 단계로 한발 내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줄 줄 안다는 면에서, 역시 노무현,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인간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설마라도 상상해 볼 짬도 없이, 막연히 끝까지 잘 버티며 싸워줄 것이라고 믿었던 건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5. 그는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치욕 속에서 그렇게 참혹하게 세상과 하직해도 좋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 정거장에서 타계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두서없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비극적 죽음을 핑계 삼아 그의 모든 행적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정치인으로서의 그를 내가 비판했던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다시 판단해야 할 새로운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이자 전직 대통령이었기에 그의 결정과 행위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 해도, 우리 사회의 한계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포기하지 않고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그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바람직하기조차 한 일이라 해도, 부정할 수 없으며 변하지 않을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는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김삼봉 교수가 썼듯이,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으니 머지않아 운명의 여신은 그 핏값을 받기 위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에 동의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에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으며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논리에도 나는 반대한다. 막연한 집단적 죄책감에 호소하는 어떤 논리도 나로서는 합당하다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조금 더 편하고 안락한 길을 선택하고 싶어질 때, 살면서 이 정도 즐거움이야 누릴 줄도 알아야 인간인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어질 때, 노무현을 돌이켜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편하고 쉬운 길, 내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라 으스대며 당연히 누릴 수 있었을 많은 것들 포기하고 온 생애를 다해 온몸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싸웠던 사람. 그 때문에 결국은 파멸로 내몰리고 말았던 사람. 그의 파멸은 어떤 안락함도 즐거움도,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당연한 양 누리기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노무현의 죽음은, 전태일의 죽음에 이어, 우리 사회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을 고민하게 만드는 또하나의 화두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은,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았다.








* 영결식 전에 쓰다 처박아둔 글이니 쓰기 시작한 지 벌써 한달이 가까워 온다. 낡은 화제 지워버릴까 잠깐 생각하다 꺼내 마무리해 둔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 - 원고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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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보베짱이 | 2009/06/18 17:10 | 장광설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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